마이베이비님(@mababeJM)께 선물 받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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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쟁탈전
햐찌님께 드립니다 랄랄라
정국은 현재 기분이 심히 좋지 않다. 아니, 솔직히 좆같기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국은 제 앞에 놓인 도시락의 밥알을 하나하나 세다가, 장조림을 깨작거리다가, 김치찌개인지 김칫국인지 모를 멀건 국에 수저를 담갔다 뺐다 하는 중이었다. 기어이 그 꼴을 보던 윤기가 한 소리를 던졌다.
"전정국, 밥 먹기 싫으면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저기 가. 가서 누워 자."
"아, 아니에요. 형. 제가 속이 좀 안 좋아갖고..."
"아파?"
정국이 설핏 놀라며 윤기와 남준, 석진을 위시한 멤버들의 눈치를 쪼로록 봤다. 다들 강철체력 정국이 아프다는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뾰족하니 말을 뱉은 윤기조차 아프냐며 금세 걱정스런 표정이 되어 정국을 본다. 아, 아뇨. 별건 아니에요. 그냥 좀 있으면 나을 것 같아요. 정국이 손사래를 치며 미미하게 온기가 남은 국을 한술 뜬다. 그러다 기어이 콜록거리며 사레가 들렸다.
"정국아, 진짜 몸 많이 안 좋아? 뭐 따뜻한 거 사다 줄까? 약이라도? 야, 얘 왜 이래."
그는 놀랍게도 속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픈 건 바로 지금 등 언저리를 다정스레 훑고 지나가며 꿀 바른 목소리를 건네는 지민을 향한 마음이었다. 고개를 숙여 정국과 눈을 마주치려 하는 지민을 애써 피한 정국이 이내 몸을 일으켜 대기실 구석으로 비척비척 향했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러니까 정국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민을 짝사랑 중이다. 길고 긴 우스운 외사랑을 시작한 지는 좀 되었다. 판타지 소설 뺨치게 놀라운 전제 사항은, 정국이 지민을 보고 바로 첫눈에 반했다는 점이다. 처음에야 그게 사랑인지 동경인지 그저 호감인지 아무것도 몰랐던 정국은 최근 절절한 짝사랑에 치이고 치여 한없이 쭈글쭈글 못나지고 있는 중이다. 음, 존나게 삽질 중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정국은 약간 억울하기도 했다. 애초에 지민이 너무 다정했다. 지민은 꿀 바른 듯한 눈빛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딱 어울리도록 다정하고 따스한 눈으로 시종일관 정국을 돌봤다. 정국이 같잖은 사춘기를 겪으며 온갖 투정에 지랄에 염병 대잔치를 할 때도 지민만은 끝까지 정국을 안아 주고, 감싸 주고, 부모마저도 못할 아가페적인 애정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러니 안 사랑하고 배길 수가 있냐는 말이다. 밥을 먹을 때도 가장 먼저 정국을 챙기고, 어딜 나갈 때도 정국을 먼저 찾았다. 스케줄을 뛸 때도 마찬가지. 지민보다 고작 두 살 어릴 뿐인데도 지민은 마치 자신이 정국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 마냥 무한의 포용력을 보여 줬다.
지금이야 사춘기도 벌써 옛날에 끝났고, 나름대로 철이 들어가고 있는 중이라 지민에게 예의를 갖춰서 대하지만, 꼬꼬마 중병아리 시절에 정국은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을 만큼 노답이었다. 와, 지민이 형 진짜 테레사 수녀라도 되는 거 아닌가. 지민이 형 나 진짜 좋아하는구나. 에서 시작된 생각을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나 지민이 형 좋아해. 로 귀결되었고 그것은 성인이 된 후 정국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이자 뜨겁고 매서운 짝사랑 겸 첫사랑의 불씨였다.
더욱 애처로운 점은 정국의 두 번째 시련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형~ 지미니형~"
"으응, 우리 태태."
"형. 저 이따가 나가서 꿀자몽 사 먹을 건데요, 형 같이 갈래요? 제가 그거, 이제, 뭐냐, 제가 쏩니다. 으히히."
"진짜? 나 사 주게? 웬일이야? 이따가 씻고 카페 닫기 전에 후다닥 다녀오자. 오는 길에 산책도 하고 좋지, 뭐."
"아싸~"
정국의 표정은 소금 식혜와 까나리액젓을 원샷한 예능 막내처럼 구겨졌다. 똥을 씹어도 저것보다는 밝을 것이 자명하다. 그뿐이랴, 손톱으로는 껴안고 있던 뚱뚱한 병아리 인형을 다 헤지도록 긁는 중이었다. 물론 본인은 지각하지 못한 무의식적인 히스테리다. 병아리 인형은 정국의 두껍고 단단한 팔뚝에 이리저리 짜부라져 갇힌 것도 모자라 이젠 손톱에 긁혀 솜이 다 튀어나올 모양새였다. 딱 십 분 전까지만 해도 지민과 호석이 쓰는 방 안에는 달콤하고 고요한 공기만이 감돌았는데, 이제는 심상치 않은 전운까지 흘렀다. 정국이 미간을 있는 대로 좁힌 채 애꿎은 인형만 괴롭히자, 지민이 침대에 길게 엎드려 누운 채로 정국을 흘깃 본다.
"정국이 너는 맨날 여기 와서 그거 괴롭히고 있냐. 네 방 좀 가."
"싫어요."
"어쭈, 그게 네 침대냐? 호석이 형 침대 아냐. 호석이 형 이제 씻고 나올 때 됐어. 너도 이제 네 방 가."
"형."
"엉."
"형은 내가 좋아요, 태형이가 좋아요?"
"어?"
"아, 아니에요."
실수다. 젠장할. 개 엿같은 초보적이고 유아적이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병신 질문을 해 버렸다. 정국은 병아리 인형을 호석의 침대에 내팽개치고는 쿵쿵쿵 걸어 방문을 우렁차게 닫고는 나가 버렸다. 세상에, 나 미친 거 아냐? 내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내가 좋아요, 태형이가 좋아요라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도 아니고 뭐야, 씨발. 아... 전정국 이 병신 호구 머저리 해삼 말미잘 새끼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의 방 의자에서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코스프레를 해 봐도, 아무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잔잔한 현타의 후폭풍만이 정국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정국은 결국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지민만이 덩그러니 자신의 방 침대에 남겨진 채 온갖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
보이다시피 정국의 두 번째 시련은 김태형(예명 V, 브이 아니고 뷔, 98년생, 현 방탄소년단 막내)이다. 정국은 요즘 정말이지 있지도 않은 옥상으로 태형을 불러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벌써 상상만으로는 태형을 흠씬 두들겨 패고도 남았다. 그러나 상상에서 태형을 때리면서도 정국은 1분 1초마다 휘몰아치는 현타에 이불을 끊임없이 차야 했다. 내가 뭐라고 태형일... 내가... 내가 병신이지... 아오...
하필 비극적이게도 태형은 정국과는 정반대다. 지민이 정국을 둥가둥가 안아 주며 우리 정구기~ 할 때, 정국은 그저 가만히 안겨 있거나, 아... 형 진짜 왜 그래여... 저 골 울려여... 라며 은근슬쩍 몸을 틀어 피했다. 그렇지만 태형은 아앙, 지미니 횽. 하며 무엄하게도 지민의 목을 꽉 끌어안는가 하면, 오히려 자신이 먼저 지민의 어깨를 끌어당겨 단단히 안고 있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작년 가을에 지민이 크게 독감을 앓았을 때도 그랬다. 지민이 많이 아프니까 되도록이면 건드리지 말고 배려 좀 해 주자, 라는 리더 랩몬 형 말에 정국은 정말로 지민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며, 혹시라도 자신이 내는 소음에 지민이 잠에서 깰까 멀리 떨어진 자신의 방에서조차 쥐죽은 듯 숨죽여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형은 역시나 비범했다. 매니저 형과 병원에 다녀온다는 지민의 뒤를 뭐 마려운 똥개새끼마냥 졸졸 따라다니며 연신 지민이형, 지민이형 괜찮아요? 하며 귀찮게 굴질 않나, 열이 38도까지 올라 끙끙 앓는 지민의 옆에서 해열 패치를 붙여 준다, 꿀물을 먹여 준다 하며 지민을 잠도 편히 못 자게 괴롭혔다. 그리고 정국은 기어이 태형과 지민이 꽉 끌어안고-정확히 표현하자면 태형이 이불로 지민을 둘둘 감싸 팔다리로 꽉 결박한 모양새-있는 꼬라지까지 목격한 것이다. 정국은 속이 터질 것 같아 그때도 혼자 팩소주를 쥬시쿨처럼 들이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장 터지는 일이었다. 내가 지민이 형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건 난데... 아니지, 김태형 저 개새끼도 우리 지민이 형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지. 그래서 매번 저렇게 붙어있고 귀찮게 굴고. 하여간에 똥개새끼. 존나 빡친다. 그리고 정국을 더욱 참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그에 대한 지민의 태도였다.
확실히 지민은 정국을 아꼈다. 누가 봐도 그랬다. 같은 멤버 형들도 인정한 지민의 정국 사랑이다. 그래서 정국은 어느 정도 우쭐한 것도 있었다. 그래, 잘 봐라. 이 미천한 것들아. 지민이 형이 제일 먼저 챙기는 건 나라니까? 팬들도, 어? 국민이니 뭐니 해서 매번 난리 나고.
그러나 최근 들어서 정국의 그 이유 있는 자신감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어쩐지 지민이 태형과 더 붙어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정국이 목격한 장면만 해도 28326343 번은 되었다. 정국은 그럴 때마다 남몰래 방으로 들어와 베개를 퍽퍽 패거나, 온 방이 울리도록 블루투스 스피커를 틀어 놓고 빵빵 터지는 이디엠을 들었다. 그래도 진정이 안 될 때는 트위터 비밀 계정으로 접속해 검색창에 '국민'을 검색하고는 검색 결과를 천천히 둘러보며 이상한 안심을 했다. 하, 역시. 지민이 형은 날 좋아해... 절대 '뷔민'을 검색해 보지는 않았다. 그것은 곧 깡소주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태형과 더 붙어 다니기 시작한 지민을, 정국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민이 자신보다 태형을 더 좋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 키만 크고, 근육이 이만해서, 매번-최소 4년 이상-틱틱거리고 츤데레처럼 굴었던 정국보다는 항상 온갖 애교와 애살을 떠는 태형이 더 이뻐 보일만도 하다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어쩌면 귀찮게 구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민의 손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고, 지민과 단 둘이 외출하고, 쇼핑하고, 밥을 먹으러 다니는 태형이 부러웠다. 확실히... 지민은 예전보다는 정국을 피했다. 사실 정국은 자신의 졸업식에 온 지민이 '정국이요? 징그럽죠 이젠... 어휴, 징그럽다, 야.' 라고 했을 때 겉으로는 웃으며 넘기고 숙소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나 이제 징그러워서 싫어요?
그렇다면 지민은 어떤가. 솔직히 조금 애매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민이 다정한 것이 죄라면 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민도 나름대로의 고충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정국이 막 성인이 된 후 시작되었다. 지민도 확실히 처음에는 정국을 정말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낯을 많이 가려서 어디서나 쭈뼛거리는 정국이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다른 멤버 형들보다는 바로 위의 형인 제가 챙겨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역시 선천적 다정남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국은 확실히 변했다. 그것은 징그럽다기 보다는 뭐랄까... 다른 의미였다.
"형, 모니터 해요? 눈 나빠지겠다. 조금 뒤로 나와요. 이렇게..."
"어? 응, 으응. 어. 그래."
피땀눈물 뮤직비디오 촬영장. 이틀동안 촬영하는 다소 빠듯한 일정에 멤버 모두들 지쳐 있을 때였다. 지민은 자신의 개인 파트를 장장 다섯 번에 걸쳐 찍고는 바로 감독님 옆으로 달려가 모니터를 시작했다. 지민의 눈이 매섭게 움직였다. 최고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다들 예민하게 작업하기 마련이지만, 지민의 욕심은 남들보다 배는 더 했기에 피곤해서 핏발이 선 눈을 가늘게 모아 뜨며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려는 찰나였다. 오른쪽으로는 메이크업을 수정 받던 태형, 왼쪽으로는 다음 차례인 남준이 서 있었고 그 사이에 지민이 비집고 들어가 있는 형상이었다. 자리가 좁아서 고개만 앞으로 쭉 내밀어 보고 있으려니, 돌연 지민의 뒤로 뜨끈한 열기와 익숙한 향이 훅 끼쳐 왔다. 정국은 한쪽 팔로는 지민의 가슴팍을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테이블을 짚은 채 지민의 상체를 곧게 세워 주었다. 정국의 단단한 허벅지가 지민의 엉덩이에 닿아 있었다.
"지, 지금 뭐하는 장면이냐, 전정국."
"백허그요."
그래, 백허그. 확실히 이러한 자세를 보통의 사람들은 백허그라고 부른다지. 그러나 지민은 이상하리만큼 쿵쿵 뛰는 심장에 적잖이 미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야, 심장아. 왜 나대고 지랄이야. 너 미쳤어? 지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등을 단단히 결박한 거대한 근육덩어리 동생에게 관심을 끄려고 했다.
"형, 형은 정말 표정이 좋아요.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짓지? 후... 전 아무래도 어색해서요."
"어... 나는, 그. 뭐냐? 평소에 거울을 보면서 연습을 많이 해! 너, 너도 연습을 해 보렴!"
씨발... 지민은 혀를 작게 깨물었다. 존나 병신같이 말했네. 정국이 지민의 한쪽 어깨에 턱을 괸 채, 숨을 한차례 뿜어낸 터라 지민의 귀가 먼저 반응했다. 격한 안무를 춘 직후여서 그런지 살짝 격양된 숨소리와 여전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정국의 뜨겁고 꿈틀거리는 몸. 지민에게 그건 너무나 큰 자극이었다. 평소에는 '오올~ 전정구기. 누구 만나러 가는데 그렇게 향수를 뿌리냐?!' 라며 장난을 걸었을 법한 향수의 향도 지민의 오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렇다. 정국은 지민이 곁에 있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성장해 왔으며, 작고 마르고 쑥스러움을 타던 아이는 이제 없는 것이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성인 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지민은 아무래도 정국을 의식하게 됐다. 숙소에서 심심할 때마다 서로의 방에 들락거리던 둘이었지만, 지민은 차츰 혼자 방에서 음악을 듣거나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을 했고, 정국은 방에서 곡 작업이나 게임을 했다.
모처럼 스케줄이 없는 휴식일 티비를 보고 과자를 먹으며 서로의 몸을 때리고, 스스럼없이 스킨십하며 장난을 칠 수 없게 됐다. 씻고 나와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채로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리는 정국이, 흰 반팔티와 헐렁한 반바지를 입은 채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지민이형, 왔어요? 같이 티비 볼래요? 하는 정국이, 기타등등의 정국의 50가지 그림자들을 보면 지민은 절로 말문이 막혀 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막내인 태형과 아무 생각 없이 노는 편이 나았다. 지민이형, 지민이형, 하고 자신을 따르는 태형을 보면 확실히 정국이 어렸을 때랑은 다르게 귀엽고 애살스러운 맛이 있긴 했으니까. 품에 안겨 있든, 품에 안고 있든 태형은 마치 임산부용 바디필로우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정국은... 지민은 정국을 안고 있는 것을 상상만 해도 이제는 한숨 같은 신음이 나오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다들 오늘은 일찍 복귀하고, 다음주 월요일에 사무실에서 미팅 때 뵈면 될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녹화 스케줄이 모두 끝나고, 백 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여유로운 이틀간의 휴식일이 주어졌다. 제아무리 덕을 쌓고 전생에 나라를 구했어도 방탄소년단 담당 팀에 들어온 이상 이틀의 휴가는 꿈도 못 꿀 일이건만. 다들 신나서 퇴근을 찍고, 정국이 먼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벤에 타 있기로 했다. 지민도 평소 같았으면 한참을 밍기적거리다 짐을 챙기기 시작했을 텐데 오늘은 피곤이 쌓이고 쌓여 그저 빨리 벤에 타서 눈을 감고 싶었다.
녹화가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나서 그런지, 방송국 지하주차장에는 방탄소년단 스텝용 차 두 대와 벤 한 대를 빼면 싸늘하기까지 했다. 지민은 삐걱거리는 팔목으로 겨우 벤 문을 밀어 열고 몸을 구겨 넣었다. 맨 뒷좌석의 가장 안쪽에는 정국이 이미 올라타 있었다. 후드 모자를 뒤집어 쓴 채 이어폰까지 꼽은 상태였다. 지민은 몸을 조심히 움직여 정국의 옆에 앉아 똑같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노래를 크게 틀어 놓았는지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밴 안으로 정국의 이어폰에서 새어나온 음악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 왔다. 지민은 눈을 살며시 떠서 정국을 훔쳐봤다. 언제나처럼 두껍고 단단한 허벅지, 그 허벅지를 감싼 타이트한 블랙 진, 가지런히 놓인 희고 깨끗한 손. 마디가 조금 굵지만 붉어서 분홍빛을 띠는 저 손. 확실히 손도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자라긴 했다. 하얀 후드집업에 가려진 넓고 탄탄할 어깨와 굵은 목. 오밀조밀하지만 선이 굵어진 이목구비.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정국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크흠, 하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괜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손을 들어 볼에 대니 정말로 뜨끈뜨끈했다. 이래서는... 나 정말 쓰레기다. 지민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짓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다시 반짝 눈을 떴다. 한번만, 딱... 한 번만... 아. 그냥 한 번만 만져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이어폰 끼고 있어서 소리도 안 들릴 테고, 지금 피곤해서 얘 정신없이 자는 중일 텐데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지민은 끝없이 정신승리를 했다. 그러나 이미 반쯤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가라앉은 공기의 벤 안이라는 것이 지민에게 쓸데없이 근거 없는 용기만을 불어넣고 있었다. 지민은 결국 금단의 열매에 손을 댄 태초의 인간마냥 손가락을 덜덜 떨며 정국의 입술을 콕, 찔렀다.
"하아..."
긴장의 연속, 지민의 심장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미친 듯 달음박치는 중이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귓가에 달린 것 같았다. 열이 얼굴로 몰려 온통 화끈거리고, 입 안이 말라왔다. 다행히 정국은 눈치 채지 못한 듯 입술을 조금 움찔거린 것 말고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우스웠다. 몇 년을 함께 살 부비며 살았는데 이제 와서 손끝 하나 대는 것도 어려워서 덜덜 떠는 것도 그렇고,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정말 친동생처럼 아꼈던 정국에게 지민 자신이 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꽃 중의 꽃 자기합리화가 만발한 지민의 머릿속은 온통 핑크빛 잉크가 펑펑 터져 이성을 가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본 정국은 예뻤고,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색정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민은 얼마 안 가 안달 난 엉덩이를 들썩이며 정국의 뺨을 슥, 쓸어내렸다.
"진짜... 뭐 이렇게 잘생겨서, 사람을 설레게 하냐. 너느은..."
그리고 그때.
"형."
"..."
"..."
"...“
정국이 눈을 떴다. 지민은 그대로 쩡 하고 굳어 파사삭 깨질 것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그래, 박지민. 죽자. 23년 살았으면 확실히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요절이 맞지만 조선시대 때 평균 수명 40살에 비하면 나름 살 만큼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좋아. 이대로 내려서 자연스럽게 택시를 잡아타서 마포대교로 가는 거야...
"형.“
지민은 정국의 부름에도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실 입술 그거 좀 찌른다고, 볼 한 번 쓰다듬는다고 천지가 역전하거나 뭍과 육지가 바뀐다거나 달이 공전을 멈춘다거나 하는 일대의 대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민의 작은 심장 속에서는 파도가 몰아치고 새 천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들었나? 내가 한 말 들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최고조로 긴장해 있었던 탓인지 정국의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던 음악이 언제부터 멈춘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정국이 이어폰을 빼고 후드 모자를 벗고는 지민의 얼굴 앞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겨우 입을 열었다.
"응.“
웃기게도 단 한 음절의 대답이 미친 듯이 떨려 나왔다. 염소 같아. 씨발. 지민은 정국의 맑고 순수한 눈동자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에 혀를 깨물고만 싶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형... 나 봐요. 응?“
"...?“
그러나 지민은 곧이어 들려온 정국의 목소리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치켜드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눈을 떠 정국을 마주봤다. 정국의 목소리도 똑같이 떨리고 있었다.
"형. 내가,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요. 그럼..."
"..."
"가만히 있어 줘요.“
그러자 꿈결 같은 정국의 입술이 지민의 입술에 맞닿았다.
정국은 정말 단어 그대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게 해 주시고, 꿈이 아니라면 씨발 씨발 씨발! 오늘도 녹화 내내 지민이 신경쓰여 깜빡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이었더랬다. 지민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교생 짝사랑하는 여고생마냥 싸르르하니 아프고, 안 보고 있자니 그놈의 빌어 처먹을 김태형과 꽁냥대는 꼴이 눈앞에 선해서 안 볼 수도 없었다. 결국 또 몸만 멀찍이 떨어져 선 채로 시선으로만 지민을 미친 듯이 좇았다.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었다. 물을 마시는 모습은 태초의 여신이 지구에 내려와 처음 발견한 옹달샘에서 물을 퍼 올려 맛보는 것만 같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모습은 천사가 지구에 사랑과 정의를 퍼트린 뒤 도나우 강가에 앉아 쉬는 모습 같았다. 그래서 지민이 말을 걸 때마다 더욱 병신스럽게 삐그덕댔다. 정국아, 물 마실래? 아! ㄴ,ㄴ,ㄴ,ㄴ,ㄴ,네! 이러한 대화가 지속되자 지민은 또 정국에게 말 걸기를 포기하고 태형에게 붙어 있었다. 그래서 정국은 또 스튜디오 구석으로 가 벽을 쾅쾅 쳤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솔직히 먼저 벤에 내려와 있을 때만 해도 지민이 가장 나중에 올 줄 알았다. 원래 항상 늦는 형이니까 의상 갈아입고 짐 챙기고 하다 보면 매번 꼴찌였다. 그래서 피곤에 절어 버린 몸을 이끌고 앉아 이어폰을 꼽고 있을 때만 해도 다음에 올라탄 사람이 윤기 형이나 진이 형이라고만 생각했다. 문이 열리는 진동과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체, 그리고 다시 닫히는 흔들림. 귀찮아서 그냥 계속 눈을 감고만 있었는데 익숙한 시트러스 향이 곁으로 다가왔다. 웬일로 지민이 정국의 옆에 앉아 연신 꼼지락대고 있었던 것이다. 정국은 곧장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날을 위해 외워 왔던 반야심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 읏, 으응......"
"....하......"
어느새 싸늘하던 벤 안의 공기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정국이 입술을 조심스럽게 떼자 지민이 자기도 모르게 정국의 목에 감고 있던 팔을 어색하게 풀어 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정국은 아까부터 자동적으로 실실 새어나오는 맹구 웃음과 함께 심장이 간지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형, 가만히 있었으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 해도 되죠."
"...응."
"좋아해요. 제가... 제가 형을 많이 좋아해요.“
그러자 지민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넘쳤다. 우응, 우으... 흑. 힉.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잉잉대며 말없이 눈물만 떨구는 지민의 얼굴을 큰 손으로 슥슥 닦아주며 정국이 조심스레 물었다. 형, 혹시 저만 형 좋아해요? 제가 싫어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아니. 나 쪽팔려서... 쪽팔리다고오...“
뭐야, 바보야. 정국이 지민을 콱 끌어안았다. 뭐가 쪽팔려요, 응? 하... 자는 거 아니면 내가 탔을 때 말을 했어야지. 그건 형이 내 옆에 너무 붙어 있으니까 떨려서 그랬죠. 몰라, 멍청아.
정국이 다시 지민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잡고 깊숙이 입을 맞췄다. 말캉한 지민의 입술이 다시 한 번 찰떡같이 정국의 입술에 맞물려 들어왔다. 정국이 혀를 내 지민의 혀를 부드럽게 문지르다 입천장을 훑고 다시 쪽쪽 빨아댔다. 타액이 은근하게 섞이고 입술이 부어올랐다. 지민의 손이 좀 더 과감하게 정국의 뒷머리를 헤집었다. 이제는 거의 정국이 지민을 덮치다시피 시트에 길게 눕힌 자세였다.
"아니, 잠깐, 잠, 정국아."
"형, 나 섰어요."
"아니, 그건 네 사정이고, 저기, 잠깐만 정국아?"
"근데... 형도 섰네요."
"아니! 내 말을 좀, 아, 아읏... 흐앗, 아, 응...“
멤버들 내려온다니까? 매, 매니저형도, 온다고! 지민의 작은 반항은 정국의 입에 다시 먹혔다. 반항의 말은 작은 울림이 되어 웅웅거리기만 했다. 정국은 한 손으로 지민의 양 팔목을 간단히 결박한 채 아예 지민의 몸 위로 올라탔다. 지민의 작은 몸이 정국에게 손쉽게 가려졌다. 혀를 내 지민의 목덜미를 살짝 핥다가 힘을 빼고 이로 작게 앙, 물었다. 지민이 몸을 비틀었다. 너 진짜 죽는다? 아까 다들 짐도 다 쌌다고. 이제 진짜 내려올 거야. 정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민의 이마와 눈두덩이, 볼, 턱에 차례로 키스했다. 강아지가 간지럽게 핥는 기분이 들어 지민은 긴장을 풀고 웃어 버렸다.
"뭐야, 강아지야?"
"이만큼 따라다녔으면 강아지라고 해도 아예 말 안 되는 건 아니죠."
"말꼬리 잡지 말고 얼른 내려와."
"네.“
정국이 지민을 한번 숨 막히도록 꽉 끌어안고 몸을 일으켰다. 지민의 등에 손을 넣어 앉히고는 다정스레 머리를 정리해 줬다.
"아래는... 이따가 숙소에서요. 제 방으로 와요."
"미친 놈아.“
지민이 정국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는데도 정국은 계속 맹구 웃음 그 자체다. 곧이어 벤 문을 열고 올라탄 호석과 윤기가 둘의 간지러운 분위기를 보고 쟤들은 뭐시여, 하며 타박했다는데... 앞으로 펼쳐질 최강커퀴연애열전다큐를 강제 시청하게 된 방탄소년단 다섯명의 멤버, 특히 이제는 정국의 고나리로 인한 지민의 무한 철벽을 맛보게 될 막내 태형 군에게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